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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2호] 전근배 - 오래된 재난, 새로운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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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68회 작성일 20-09-07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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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버려질 것이다’


팬데믹과 함께 ‘커뮤니티’도 ‘케어’도 모두 무너졌다. 코로나19 위기 속 장애인에 대한 관심은 첫 사망자가 청도 대남병원의 정신장애인으로 알려지며 높아졌다. 언론은 물론 청도군청 역시 과거부터 만성 폐 질환을 갖고 있었던 사망자가 20년 이상 폐쇄된 공간에서 생활하며 몸무게가 42kg에 불과할 정도로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 있었던 점을 감염에 치명적이었던 이유로 꼽았다.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던 취약한 몸, 그 배제로 인하여 취약해진 몸들이 고립되어 있는 곳에서부터 첫 사망과 집단감염이 시작되었고 이는 다시 지역사회의 위기로 되돌아왔다.


2월 23일부터는 시설이나 병원이 아닌 지역 내에서도 대구를 중심으로 장애인 자가격리자 및 확진자,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상 최초로 정부가 휴업을 명령하고 개학을 연기한 3월이 되자 지역서비스 기관들이 하나같이 업무를 중단하였다. 갈 곳 없는 장애인의 열악한 삶, 생계와 돌봄을 함께 책임져야 하는 장애인 가족의 이중고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제40회 장애인의 날 메시지를 통해 “재난의 크기가 모든 이에게 평등하지 않다”며 제도 개선을 언급했지만, 대통령의 메시지가 있기 이전인 3월에는 제주에서, 메시지가 발표된 이후인 6월에는 광주에서 발달장애인과 그 어머니의 죽음이 이어졌다.


반년이 지나서야 보건복지부는 우리나라의 첫 장애인 대상 감염병 매뉴얼이라며 몇 쪽짜리 자료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 속에도 장애인에게 적합한 방역체계를 갖추고 돌봄 공백을 방지할 의무주체가 누구이며, 예산은 어디에서 부담하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역대급이라 했던 7월의 3차 추경에서조차 이 매뉴얼의 작동을 위한 추가적인 예산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발달장애인을 위한 돌봄 예산은 삭감되었다. 결국 별 다른 조치 없이 8월이 되었다. 이제 서울을 중심으로 2차 대유행이 번지고 있으며, 1차 대유행의 중심이었던 대구에서는 내년도 예산의 대대적인 긴축 예고에 장애인 생존권이 다시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많은 이들이 ‘포스트코로나’를 말하며 우리 모두가 코로나 이전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 ‘세계’에 속해 있었던 이들의 일일 뿐이다. 방역의 핵심이었던 마스크의 1차 공적 공급이 끝난 지금까지도 청각장애인들은 입이 보이는 투명 마스크를 가족과 봉사자의 손에 의지해 한 땀 한 땀 제작하고 있다. 우리는 결코 동일한 재난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구의 한 장애인운동가는 “우리는 코로나블루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코로나블랙”이라고 말했다. 그의 ‘암흑’은 ‘나는 결국 국가로부터 버려질 것’이라는 궁극적인 불안의 표현이었다.


장애인은 지금의 재난만큼이나 그 재난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회의 본 모습이 더 두렵다. 사회적 거리두기 아니, 사회적 고립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장애인과 그 가족이 강요당해 왔었던 삶의 형태였을 뿐이다. 더욱 큰 절망은 지금과 같은 유례없는 재난조차 자신과 가족의 현실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 그렇기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된다 할지라도 나의 삶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확인에서 온다. 



코로나가 드러낸 우리 사회 돌봄의 3가지 모습


‘돌봄’은 코로나19가 드러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본 모습 중 하나이다. 나는 감염병 상황에서 드러난 장애인의 돌봄 단절과 공백이 어떤 개별적인 서비스나 제도들의 불충분함에서 기인하는 것, 그러니까 감염병 대유행이라는 예측하지 못한 변수로 인해 발생한 특수한 문제라고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기존 돌봄에 내재하고 있었던 폐단의 본래 성질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에 가깝다. 여기에서는 바이러스로 인해 (재)확인된 3가지 폐단에 대해 짚고 싶다. 첫째는 의료적 기준에 따라 ‘장애인’이 되었지만 의료적 불리함에 처하게 되는 모순이고, 둘째는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논리로 돌봄의 전달방식을 구축해온 결과가 만든 불평등이다. 셋째는 그 결과 돌봄이 권력화 됨으로써 나타난 윤리의 상실이다.


우리 사회는 ‘계약’ 상 등록된 사람들만 장애인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 선별과 분류를 의료적 기준에 기초한다. 엄밀하고 세분화된 의학적 기준에 들어맞는 몸만을 ‘장애인’으로 인정하며 신체를 관리해 온 국가의 명분은 무엇보다 이들의 ‘의료적 필요’ 또는 ‘복지적 필요’를 가장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장애인 1명이 평균 2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보유하고 있으며, 10명 중 8명이 만성질환을 지니고 있음에도 중증장애인의 건강검진 수검률은 비장애인에 비해 20% 이상 떨어지며, 병원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미충족 의료 경험은 두 배 이상 높다. 2017년 장애인건강권법이 제정되었지만 의료계의 관심은 매우 낮다. 건강과 생명은 이미 불평등하게 대우받아 온 것이다.


의료적 접근이 필요한 때마다 오히려 ‘등록된 사람들’은 먼저 배제되었다. 장애화된 사회에서 ‘장애인’이라는 규정은 필요한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받는 수단이 아니라 ‘덜 중요한 존재’라는 낙인의 다른 표현이 되었다. 재난의 순간에는 이런 문화가 더 자연스럽게 용인되었다. 의료적 ‘장애인’으로 지정하였음에도 정작 이들을 위한 의료체계와 사회보장은 재난 시든 평상 시든 늘 후순위가 되었다. 인정된 의료적 필요자이지만 의료보장은 하지 않는 이 ‘장애인 모순’은 2015년 메르스에 이어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그렇다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재난 시에 더 심각해지는 이유는 재난이 심화되어서라기보다 장애 정의와 등록의 목적 자체가 지닌 본래의 의도(가령, ‘별도 취급’)가 합목적적으로 원활히 작동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별도 취급의 방식은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원칙에 따라 구축되었다. 동료시민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 채 늘 ‘장애인’으로 분류되어 가장자리에 머물러야만 했던 사람들은 재난이 닥치자 어느 새 맨 앞줄이 되어 있었다. 한 지방의 폐쇄병동에서 20년 간 격리 수용되어 있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아무개 씨의 삶은 경계 바깥의 존재가 얼마나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는지 보여주었다. 공동체는 특정 감염병과 종교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으려 애썼지만 그를 ‘치료 한다’는 명목으로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고 가두어 두었던 것은 바로 그 공동의 권력이었다. 우리 사회의 ‘계약’은 연고자 또는 가족이라는 사적 책임소재가 더 이상 역할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지정된 몸들을 일정하게 구획한 공간에 밀어 넣고 최소한의 생존만을 보장해왔다.


국가는 민간을 통해, 민간은 집단수용이라는 방식을 통해 가장 적은 돈으로 가능한 한 많은 몸들을 관리하고자 했다.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한 절반 이상의 사망자가 장애인거주시설, 요양원, 폐쇄병동과 같은 집단 수용시설에서 나타나고 있다. UN과 WHO, 국제 장애단체들이 조속한 퇴소·퇴원과 지역생활의 보장, 근본적인 회복과 복구를 위한 시설폐쇄와 탈시설 전략 강화를 주문하고 있지만, 한국은 정반대의 조치를 취해오고 있다. 시설 거주인이 아닌 그들로부터 지역사회 주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예방적 코호트격리’라는 생소한 개념으로 시설을 고립시켰으며, 거주인들에게 한시적으로라도 독립된 방과 화장실, 개별 지원인력을 제공하여 주거를 분산하라는 요구를 외면했다. 불평등한 돌봄 환경이 불평등한 방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이런 장애인 돌봄은 ‘돌봄을 제공하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를 구분하고 전자를 권력화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많은 반민주주의적 행태가 그러하듯 돌봄의 권력화는 돌봄의 주체를 ‘권리를 지닌 자’에게서 ‘(권리 실현의)의무를 이행하는 자’로 역전시켰으며, ‘권리를 지닌 자’에게서 시민의 자격을 박탈했다. 나아가 자신에게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자격증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권리성이 박탈된 돌봄은 능력에 따라 누릴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 되었으며, 그만큼 개인화되었다. 가령, 수용시설로의 입소과정에서는 배제되었던 자신의 선택이 수용시설을 나오려고 할 때에는 이후 뒷감당을 스스로 할 의지(소위 ‘욕구’)가 있는지 또는 나올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소위 ‘자립생활역량’) 재차 강조되었으며, 의사결정이 어렵거나 확인되지 않은 이들은 범죄로 시설이 폐쇄될 때마저 ‘무응답은 곧 시설서비스 욕구’라며 다른 시설로 손쉽게 전원되어 왔다. 누군가를 어디에 ‘배치’하고, 어떤 것을 제공할 것인지 결정하는 이 권력은 비단 시설 정책만이 아니라 커뮤니티케어 정책에도 기초가 되어 있다.


무엇보다 돌봄의 권력화는 윤리를 상실시켰다. 즉, 우리 사회의 돌봄이 무엇을 전제하고 있으며, 돌봄을 통해 무엇을 목적하고자 하는지, 그에 합당한 자세와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모든 논의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버렸다. 매뉴얼에 없는 위기상황이 닥치자 더욱 또렷하게 그 한계가 드러났다. 공공기관이든 민간기관이든 자신의 서비스 제공 의무를 쉽게 져버리고 회피했다. ‘함께 살자’고 배웠던 지원인력들은 위기에 ‘함께 있지’ 않았다. 장애인의 기본권은 비장애인에 비해 쉽게 침해되었다. 예를 들어, 가족을 포함한 외출, 외박, 면회 금지 등 (장애인과의 밀접촉이 불가피한) 노동자들에게는 그러하지 못하는 일들이 수용시설 거주인들에게는 쉽게 자행되었다. 예방적 코호트격리 명령으로 14일 간 시설에 강제 수용된 사회복지사들의 외침만이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장애인의 삶을 표현해주었다. ‘우리는 인권이 없냐!’ 사태 초기 일부 자립생활센터나 인권단체를 제외한 모든 기관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돌봄을 멈출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돌봄의 주체가 국가이며 그를 단지 대행하는 것이 자신들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 권리의 주체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제공자 입장의 용어가 ‘돌봄’일지 모른다. 애초 장애인은 늘 ‘돌봄’의 대상일 뿐 주체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코로나의 시점이 아닌 장애인의 시점에서


역사적으로 질병의 발생과 확산은 일정하거나 무차별적이지 않았다. 코로나19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장애인이 겪는 불평등의 역사는 늘 존재해왔다. 장애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국가 정책의 우선적인 고려대상에서 밀려났으며, 재난 시에는 그 존재가 잊혀져왔다. 어쩌면 장애인은 물리적 주소지와는 관계없이 높다란 무형의 수용시설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역사회 돌봄의 취약함이 비극적인 존속살인과 자살로, 수용시설에서의 집단감염과 사망으로 반복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K방역’의 우수성만이 칭송되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장애인과 국가 사이의 거리가 솔직하게 드러나는 순간일 것이다. K방역은 국민을 지킴과 동시에 누가 국민인지 구별해 주었다.


지난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장애인의 날)을 맞아 대구지역의 장애인단체들이 감염병 대책과 지역생활 권리 보장을 요구하며 외친 구호는 ‘재난의 일상화, 일상의 재난화’였다. 어떤 사람들은 감염병보다 배고픔이 더 두렵다. 어떤 이들은 감염병보다 당장 닥칠 자신의 생일이 더 공포스럽다(생일이 지나면 65세로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포스트코로나 사회의 장애인 ‘돌봄’에 대한 논의는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세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공적 마스크를 주고받는 세계가 아니라 공장에서 제작해 주지 않는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장애인의 일상, 장애인의 세계가 아닌 ‘코로나’라는 지금 세계의 시점을 기준으로 포스트코로나 사회의 장애인 돌봄에 접근한다면, 또 다시 트렌드처럼 제시되고 있는 보건과 복지의 통합, 정보통신기술과 기계를 활용한 언택트 복지와 같은 논의들이 결국 지금의 장애인을 더 억압하는 데 일조하거나, 새롭게 ‘장애화되는 사람들’을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후 장애인 돌봄에 필요한 여러 과제를 검토하기에 앞서 코로나가 되어서야 비로소 절실히 깨닫게 된 것들, ‘장애인 모순’, 자본주의적 전달방식, 돌봄의 권력화라는 문제를 한 번 더 같이 고민해 주십사 청하고 싶다.


루소는 「인간 사이의 불평등 기원과 근거들에 대한 논문」에서 인류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나는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나이, 건강, 체력,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등) 차이에 의한 자연적 불평등이며, 또 다른 하나는 (사회적 합의와 규범적으로 통용되는) 정치적 불평등이다. 그는 자연적 불평등의 근원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이 두 가지 불평등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관계가 있는가를 찾아보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이 양자의 관계를 찾는 일은 주인들이 듣고 있는 가운데 노예들끼리 토론하기에 좋은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자가 아닌 후자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요구하여야 하며, 코로나19를 통해 장애인과 모두를 위한 돌봄의 가치와 윤리를 다시 세우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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