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10호] 정은희 - 19세기 영국 정신의료시설(Asylums) 변화를 통해 살펴본 물리적 환경과 정신건강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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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 어싸일럼과 도덕치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영국에는 ‘어싸일럼(Asylums)’이라 불리던 정신의료시설이 있었다. 본 글에서는 ‘피난처와 같은 공간’이라는 의미의 어싸일럼이 19세기 동안 영국의 주요 정신의료시설로 확장되는 과정을 통해 정신건강과 물리적 환경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 가치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 산업혁명을 지나며 영국의 주요 도시들은 노동자들의 급격한 유입으로 과밀화되고 슬럼화되었다. 도시는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콜레라 등 전염병의 온상이 되기도 했고, 공동화장실을 수백 명이 사용해야 할 정도로 서민과 노동자들의 거주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이 시기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수도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는데, 1807년 영국의 인구 만 명당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수는 2.26명에서 1844년 12.66명으로 약 6배가 증가했다고 한다(Arieno, 1989).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광인수용소에 감금되다시피 수용되어 있거나 지역사회에서도 열악한 주거환경에 처해있었다. 사회적으로도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인도적인 처우가 이슈가 되자 영국은 국가적 차원의 관리체계 필요성을 느끼고, 어싸일럼법 제정을 통해 보다 위생적이고 안전하며 치료에도 도움이 되는 시설을 마련하게 된다. 즉 빈곤과 박탈 및 사회적 불편감이 가득한 가정과 지역사회보다는 오히려 닫혀 있지만, 인간적이고 규칙이 있는 환경을 받을 수 있는 시설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과 함께 도덕 치료(moral treatment)에 대한 희망이 더해져 어싸일럼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도덕 치료의 개념은 18세기 필리프 피넬에 의해서 제안된 치료법으로, 프랑스 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감금과 구속의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처우와 일상생활의 회복환경을 제공하여 치료하고자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도덕치료는 유럽과 영미 국가들에서 정신질환 치료의 주된 패러다임이 되었고(Shorter, 2009, 최보문 역), 이러한 도덕치료를 적용할 적절한 제공장소가 어싸일럼이었던 것이다. 특히 어싸일럼의 설계과정에는 정신의학자, 건축가, 조경계획가, 병원관리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9세기 영국 어싸일럼의 공간적 변화 특성
그러나 처음부터 어싸일럼이 도덕치료에 적합한 시설로 설계된 것은 아니다. 초기의 어싸일럼은 위생적이고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지만, 감시와 감독이 여전히 주된 기능을 담당한 형태를 보인다. 이에 따라 벤담의 파놉티콘(panopticon) 디자인을 따라 건설된 영국의 글라스고우 어싸일럼은 중앙의 감시탑과 병실 내 높은 창을 지닌 형태를 보이게 된다.
19세기 중반에는 정신질환 치료에 효과적인 물리적 환경에 대한 기준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이를 적용하는 어싸일럼이 등장한다. 한웰 어싸일럼은 복도형 디자인으로 불리는데, 넓은 복도에 편안한 가구 등을 배치하여 밝고 자유로운 병원 분위기를 만들고, 낮과 밤의 활용공간을 구분하였으며, 낮은 창을 통해 외부 조망이 가능한 디자인 등이 특징이다. 특히 1847년 의사 코놀리가 제안한 정신의료시설의 계획원리는 19세기 어싸일럼 공간구조 및 환경개선에 큰 영향을 주었다(Connolly, 1847). 즉 환자의 수용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 1인실(single room) 등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방안, 일과 신체적 활동 증진 환경 조성, 사회복귀에 대한 동기를 강화하는 조망권 확보와 쾌적한 실내·외 환경, 자연환경의 중요성 등을 공통적으로 제안하였다. 이와 더불어 1845년의 어싸일럼법 개정으로(County Asylum Acts) 주 정부의 예산과 운영지원이 가능해져 어싸일럼의 수는 빠르게 증가한다. 1847년 21개이던 주립정신병원의 수는 1910년 95개로 증가하였다. 어싸일럼을 통해 정신질환의 회복률에 관한 보고서(Smith, 1999)도 다수 등장하는데 도덕치료에 기반한 물리적 환경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희망이 높아졌던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어싸일럼의 수가 증가한 속도보다 정신질환 인구수의 증가속도가 더 빨랐다. 한 연구에 따르면, 수용된 빈곤 정신장애인 수도 1847년 5,247명에서 1910년 94,215명으로 증가했다(Hamlett & Hoskins, 2013). 이에 따라 어싸일럼도 치료를 위한 공간으로써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즉, 도덕치료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병원의 규모가 작고 적절한 인력이 필요하지만, 이 사업을 위한 지방세 인상 제한으로 병원이 과밀화되고, 인력지원 제한 등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이 시기 어싸일럼의 디자인도 증축과 대규모 수용이 용이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케인 힐 어싸일럼은 최대 수용인원이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정신질환의 만성화와 정신과 약물의 발견은 어싸일럼이 초기의 감시와 감독 기능으로 회귀하는 디자인으로 변화하는 데 기여했다.
정리하자면, 19세기 영국의 어싸일럼은 산업혁명을 효과적으로 이뤄내려는 방편으로써 사회 통제적 기능을 하면서도, 시설의 환경개선과 도덕치료라는 접근을 통해 환자를 낫게 할 수 있다는 기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정신건축의 근대화 계기를 마련하였다(임미영, 2011). 또한, 물리적 환경과 인도주의적 접근을 통해 정신질환의 치료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싸일럼 건축 과정에서 나타난 이상적인 치료환경 및 도덕치료에 대한 그 당시의 희망은 정신질환의 만성화와 시설의 대규모화로 체계화되지 못한 채 가치로만 남게 되었다.
21세기 인권과 회복에 기반한 정신건강 서비스 계획에 주는 함의
우리나라 역시 한국 전쟁 이후 기도원과 부랑인시설부터 정부의 법적인 지원을 받는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원까지 대규모 시설수용의 시기를 지나왔다.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으로 정신장애인의 지역사회 통합의 기반이 마련되고 20년 후 정신장애인의 인권과 복지가 강조된 정신건강복지법으로 전부 개정되는 과정도 지나왔다. 그러나 UN 장애인권리협약(CRPD)에 근거한 인권과 회복 지향 서비스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접근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그 가치를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1995년 이후 사회복귀시설이라 불리던 정신재활시설 유형에 주거와 관련된 시설은 정신건강복지법 개정 전까지도 공동생활주택과 생활시설 및 종합시설로 한정되어 있었고, 최근에야 지역사회전환시설이 추가되었다. 정신장애인의 사생활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지원주택의 개념은 시범사업 과정에 있다. 거주형 정신재활시설 내에서 사생활을 보장하고 사회적 활동과 일상생활 참여를 촉진하는 물리적 환경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의료와 재활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21세기에 맞는 인권과 회복을 지향하는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었다는 주장이 의미와 가치로만 남지 않도록 정신장애인 당사자와, 전문가, 실무자 및 정책 관계자들이 법적·제도적 지원과 이상적인 회복 서비스의 가이드라인을 구체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임미영 (2011). 대학생의 정신병원 인식유형에 관한 연구. 공주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Arieno, M. A. (1989). Victorian Lunatics: A Social Epidemiology of Mental Illness in Mid-Nineteeth-Century England. Susquehanna University Press, Selinsgrove.
Connolly J. (1847). The Construction and Government of Lunatic Asylums and Hospitals for the Insane. John Churchill.
Hamlett, J., & Hoskins, L. (2013). Comfort in small things? Clothing, control and agency in county lunatic asylums in nineteenth-and early twentieth-century England. Journal of Victorian Culture, 18(1), 93-114
Rutherford, S. (2005). Landscapers for the mind: English asylum designers, 1845-1914. Garden History, 61-86.
Shorter, E. (2009). 정신의학의 역사 (최보문,역). 서울: 바다출판사 (원저: A History of Psychiatry, 1997)
Smith, 1999, Smith, L. (1999). Cure, Comfort and Safe Custody: Public Lunatic Asylums in Early Nineteenth-century England. Bloomsbury Publishing.
Thompson, J. D. & Goldin, G. (1975). The Hospital: A Social and Architectural History. Yal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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