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9호] 하경희 - 권리 주체로서의 정신장애인 당사자 운동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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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 이래로, 한국의 정신건강 체계는 여전히 사회적 치안, 격리, 통제의 역할에 주력해 왔다. 정신건강 서비스는 의료적 모델에 기반을 둔 전문가 중심의 치료·재활 접근이 주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강제·장기 입원, 강압적 치료, 자립지원 체계 부재, 사회적 차별과 배제 등 정신장애인에 대한 인권침해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지난 20여 년간의 정신건강 체계의 퇴보적 흐름은 2010년 중반 이후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된다.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과 같은 정신장애인 당사자 단체가 정신건강 정책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다. 2014년부터 정신장애인 당사자 단체가 참여해온 ‘정신보건법 폐지 공동대책위원회’는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추진공동행동’을 결성하고, 복지중심의 새로운 법률 제정을 추진하였다. 결과적으로 정신건강복지법이라는 타협으로 귀결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운동으로서 조직화되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마인드포스트,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한국정신장애인협회, 멘탈헬스코리아, 안티카, 침묵의 소리, 희망바라기, 마음사랑 등 다양한 정신장애인 당사자 단체가 조직화되었다. 이들은 강제입원 폐지를 위한 헌법소원 청구, 정신보건법 폐지 운동, 정신보건법전부개정안 반대운동을 거치며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사회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동료지원활동이나 절차보조사업 등의 당사자 주도 활동, 강제입원 등의 제도적 개선 및 입법 활동, 차별과 혐오의 언론 비판, 문화예술 활동을 통한 사회적 인식 개선 등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기존의 전문가 중심의 정신건강 체계에 큰 변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우리를 빼고 우리에 대해 말하지 말라’
당사자 운동이 가장 활발한 장애 영역의 경우 자립생활운동 등을 통해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권리를 주장하며 이를 실제적인 정책과 제도의 변화로 이끌어냈다. 이를 통해 과정과 결과로서의 임파워먼트를 적극적으로 실현해 가고 있다.
정신장애 운동의 경우 서구에서는 흑인, 여성, 성소수자 운동 등에 영향을 받아 1970년대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왔다(Tomes, 2006). 의료적 모델 및 정신의료체계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점을 제기하며, 치료과정에서의 정신장애인의 권리와 참여, 주거, 고용 등 사회적 권리 확대에 목소리를 냈다(Chamberlin, 1990; Sharfstein and Dickerson, 2006). 이에 공공 정신건강시스템에서도 당사자 운동의 목소리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정책과 제도의 중요한 주체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정신건강시스템을 개혁하고, 의료모델에서 회복패러다임으로 전환해 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회운동으로서 당사자 운동은 ‘당사자주의’를 핵심적 가치로 하는 조직적인 운동이다. 당사자주의는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재정의하면서, 삶의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세력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김현민, 2019). 당사자주의의 핵심은 자기대표성과 자기결정권이다(김대성, 2003). 자기대표성은 당사자의 이해와 요구가 전문가 집단 혹은 타인에 의해 대리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그 문제에 관한 한 대표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결정권은 당사자의 이해와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 시기, 그 결과에 따른 책임까지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당사자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참여에 있다. 즉, 배제하고 차별하는 사회를 바꾸어 나가기 위해 당사자의 눈으로 판단하고, 당사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당사자의 요구가 사회구조적으로 관철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즉, 우리를 빼고 우리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당사자 운동을 위한 토대 구축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정신장애인 당사자 운동이 외연을 확대하고 운동의 방향성을 모아나가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토대 구축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당사자 운동을 위한 물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현재의 당사자 단체들 중 공간을 마련하고, 활동가에게 적정한 급여를 지급하며, 사업을 위한 예산을 확보한 곳은 일부에 불과하다. 미국의 경우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운영하는 대안적인 서비스를 인정하고 주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으며(Masterson and Owen, 2006), 한국도 장애 영역에서는 제도적 지원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 단체에 대한 지원, 동료지원 등의 당사자 주도 서비스 및 기관의 제도화가 정책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당사자 운동 내부적으로는 역량강화 및 리더양성을 위한 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사회운동에는 구심점으로서의 리더가 중요하며, 지금처럼 정신장애인 당사자 운동이 빠르게 성장해 온 것 또한 현재 리더들의 역량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소수의 개인에 의존한 활동은 지속성과 확장성에 한계가 있다. 당사자 운동의 저변을 넓혀가기 위해서는 각 단체가 당사자 역량강화와 리더양성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특히 현재 많이 양성되고 있는 동료지원가들을 조직하고 연대해 나가는 것부터 필요할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힘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당사자 단체 간의 연대가 보다 강화되어야 한다. 당사자 단체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만큼 다양한 방식의 연대를 통해 힘을 결집해 나가야 한다. 연대의 토대는 이해관계가 아닌 동일한 입장과 공유된 가치이다. 이를 위해 정신장애인 당사자 운동의 철학적 토대에 대한 논의가 보다 치열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결국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존에 사회적으로 혹은 의료적으로 규정된 부정적인 정체성을 전복해 나가고, 당사자 스스로 새로운 정체성을 재정의해 나가야 한다. 나아가 소수자 운동, 인권단체, 사회운동 단체, 전문가 그룹, 문화예술 및 미디어 등 다양한 영역으로 연대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결국 사회적 공감대와 설득을 이루어나가기 위해서는 폭넓은 연대가 중요하다.
지난 20여 년간의 정신건강체계의 퇴보적 흐름을 바꾸어나갈 힘은 결국 당사자에게 있다. 귄리 주체로서의 정신장애인 당사자 운동이 확대해 나가기를 기대하고 지지한다.
참고문헌
김대성. (2003). “장애인당사자주의 운동의 참여와 연대정신”. 진보평론, 18: 170-187.
김현민. (2019). “당사자운동에 참여하는 정신장애인의 변화과정 연구”. 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Chamberlin, J. (1990). The ex-patients' movement: Where we've been and where we're going. The Journal of Mind and Behavior, 11(3): 323-336.
Masterson, S., and Owen, S. (2006). Mental health service user's social and individual empowerment: Using theories of power to elucidate far-reaching strategies. Journal of Mental Health, 15(1): 19-34.
Sharfstein, S. S., and Dickerson, F. B. (2006). Psychiatry and the consumer movement. Health Affairs, 25(3): 734-736.
Tomes, N. (2006). The patient as a policy factor: A historical case study of the consumer/survivor movement in mental health. Health Affairs, 25(3): 7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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