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조울증 약 먹고 살 찌는 이유, 뇌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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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5-17 15:35 | 수정 2021-05-17 18:55
기분이 지나치게 들떠있는 상태인 조증, 지나치게 침울한 상태인 우울증, 조증과 우울증을 오가는 양극성 장애인 조울증, 이들을 통틀어 기분 장애라고 부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조울증, 우울증 등 기분 장애로 치료를 받은 환자는 101만 7천 명, 5년 전보다 30.7% 늘어났습니다.
기분장애는 그저 성격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넘겨선 안 되며, 제대로 된 진단을 받고 치료를 진행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환자들 사이에선 처방약을 먹은 뒤 식욕이 늘고 살이 급격히 쪘다며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면 우울증, 조울증 약을 먹은 뒤 많게는 수십 kg까지 살이 찐 사례들이 종종 나오곤 합니다.
문제는 이런 체중 증가 부작용의 원인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 환자들은 처방약을 먹길 꺼리거나 임의로 먹지 않아 상태를 더 악화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국내의 한 연구진이 기분장애 등에 처방되는 비정형 항정신병 약물과 체중 증가의 인과관계를 찾아냈습니다.
조울증 약물 비만의 원인은 뇌 속에 있었다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손종우 교수와 석박사통합과정 유은선 학생 등은 조현병, 조울증,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처방되는 리스페리돈이 어떻게 비만을 유발하는지 실험했습니다.
먼저 연구팀은 생쥐에게 리스페리돈이 포함된 먹이를 주고 변화를 관찰했습니다.
그러자 생쥐의 식욕이 늘더니 살이 찌기 시작했습니다. 리스페리돈의 영향으로 생쥐에게 비만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때 연구팀은 생쥐의 뇌에서 시상하부를 살펴봤습니다.
시상하부 안에는 우리 몸의 배고픔, 목마름, 감정표출 등의 행동을 조절하는 신경세포들이 있습니다. 식욕을 자극하는 신경세포가 활성화되면 배고픔을 느끼고, 반대로 식욕을 억제하는 신경세포가 작동하면 배부름을 느끼는 것입니다.
리스페리돈…알고 보니 식욕 억제 신경세포 억제
연구팀은 생쥐의 뇌 속 시상하부를 연구한 결과, 식욕 억제 신경세포를 자극하는 멜라노코르틴이라는 물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멜라노코르틴은 식욕 억제 역할을 하는 신경세포를 활성화해 우리 몸이 배부름을 느끼게 합니다.
이때 멜라노코르틴이 식욕억제 세포에게 신호를 전달하려면 세포막에 신호를 전달하는 단백질인 수용체가 있어야 합니다. 멜라노코르틴이 수용체를 통해 식욕 억제 세포를 흥분시키면, 신경세포가 활성화되면서 식욕 억제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멜라노코르틴 수용체는 잠들어있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부모님의 '손'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스페리돈을 복용했더니 이 수용체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수용체 발현량이 감소해 식욕 억제 신경세포에 전달되는 자극이 줄고, 식욕 억제 신경세포가 덜 활성화되면서 공복감이 해소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연구팀은 리스페리돈 자체만으로도 식욕 억제 신경세포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결국, 리스페리돈을 복용한 사람은 시상하부 속의 식욕 억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밥을 많이 먹어도 배부름을 느끼지 못하고, 식사량이 지나치게 많이 늘어 살이 찌는 것입니다.
식욕 억제 세포를 깨우는 '인공 손'이 해결책
그렇다면 리스페리돈 복용을 줄이는 게 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연구팀은 리스페리돈을 그대로 복용하되, 세트멜라노타이드를 함께 이용하면 비만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연구팀은 세트멜라노타이드가 앞서 말한 식욕 억제 신경세포 자극 물질인 멜라노코르틴과 유사하게 생겼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세트멜라노타이드는 멜라노코르틴 수용체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수용체가 식욕 억제 신경 세포를 자극해, 식욕을 억제할 수 있도록 교정을 하는 것입니다.
앞부분에서 멜라노코르틴 수용체를 쉽게 손에 비유했는데, 세트멜라노타이드는 인공 손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세트멜라노타이드를 복용하더라도 리스페리돈의 본래 사용 목적인 항정신병 약물 효능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연구팀이 생쥐에게 마약 성분인 암페타민을 먹여 정신질환을 유발한 뒤, 리스페리돈을 먹였습니다. 그러자 생쥐의 정신 질환에는 차도가 있었지만 살이 지나치게 쪘습니다.
그런 생쥐에게 리스페리돈과 함께 세트멜라노타이드를 투약했더니, 생쥐는 살이 덜 찌고 정신병은 호전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비만 걱정 없이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리스페리돈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비정형 항정신병 약물의 특징에서 기인합니다.
과거에는 정형 항정신병 약물이 조현병 치료에 주요 쓰였습니다. 뇌신경 세포에 흥분을 전달하는 도파민 수용체를 차단해 도파민이 과하게 분비되는 걸 막아 조현병 증상을 줄인 것인데요. 문제는 이 약물을 복용했을 때 심한 졸음 등의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약물이 비정형 항정신병 약물입니다. 비정형 항정신병 약물은 약 성분이 한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되는 게 특징입니다. 기존 정형 약물이 무조건 도파민을 억제하는 데 집중했다면, 비정형 항정신병 약물은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조절해 증상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약 성분이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되다 보니 흥분 억제 효과 외에도 식욕 증가 같은 부작용이 발현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연구는 리스페리돈을 복용해야 하는 환자들에게 무척 반가운 소식이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연구팀은 리스페리돈뿐만 아니라 '올란자핀' 같은 다른 비정형 항정신병 약물들 역시 멜라노코르틴 수용체 문제 때문에 과도하게 식욕 증가하는 부작용이 나타났을 가능성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리스페리돈뿐만 아니라 다른 비정형 항정신병 약물을 복용하는 환자들 역시 비만 등의 부작용 걱정을 덜어낼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조현병, 조울증,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비만이나 살찔 걱정 없이 맘 편히 처방약을 복용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손종우 교수와 석박사통합과정 유은선 학생 등이 미국 텍사스 주립대 첸 리우 교수와 공동연구로 진행한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실험의학저널' 218권 7호에 온라인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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